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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기원



원시 시대, 생활의 도구가 전혀 발달되어 있지 않을 때는 목이 마르면 짐승처럼 개울이나 웅덩이에 입을 바로 대고 마시거나 또는 손바닥에 물을 움켜쥐고 마셨을 것이다. 토기, 석기, 철기 시대를 맞으며 불을 피울 줄 알게 된 때부터는 음식을 익혀 먹으며 물을 끓여 차잎을 우려 마시거나 물에 차잎을 넣어 맑은 다탕(茶湯)을 마시기도 하였다. 차잎을 가루내어(현대의 가루차:말차) 뜨거운 물에 가루를 넣고 휘저어서 방울방울 어우러진 탁한 다유(茶乳)를 마시는 생활양식으로까지 발달되기에 이르렀다. 


당나라 육우가 쓴 『다경(茶經)』을 보면 차는 신농씨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신농은 성은 강(姜)씨이고 중국의 삼황(三皇)중의 한 황제로 백성들에게 농사 짓는 법, 불로 음식을 익혀먹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또한 수백 종의 풀과 나무를 맛보았으며, 독초에 중독되었을 때는 차잎을 씹어 해독하였다 한다. 신농씨는 차잎에 탁월한 해독 효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만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약용이나 식용으로쓰게 했다. 그 후 저장법이 발달함에 따라 차는 기호 음료로 쓰였을 것이다. 차의 기원은 농경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농씨는 불의 덕으로 임금이 되었다 하여 '불꽃 임금'으로 불리운다. 가루차라하면 현대인은 일본 고유의 차로 오인하기도 하는데 차의 문헌을 살펴보면 우리 나라에서도 가루차를 즐겨마셨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차잎을 맷돌로 가루내고 숟가락 끝부분에 붙은 고리를 이용해서 거품을 내어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진감국사 혜소(慧昭 774∼850)는 분말로 만들지 않고 돌솥에 섶 삶듯이 삶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에도 잎차와 가루차가 상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차의 역사


• 신라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차 종자가 처음으로 파종된 때가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년) 왕명의 의하여 대렴(大廉)이 당(唐)으로 부터 가져온 차종자를 지리산 계곡에 심은 것으로 전하나 이미 선덕여왕(632~647) 시절에 차가 있어 왔는데 이때 이후 더욱 성행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인들은 일정한 의식과 관계없이 생활속에서 차를 사랑하였다. 특히 국선(國仙)이던 화랑들은 산천경계를 유람하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차를 즐겼다. 강릉 한송정에 석정(石井), 석구(石臼)같은 유적이 아직 남아있는것도 좋은 증거이지만, 삼국사기 '열전' (列傳)에 나타난 설총 '화왕계(花王戒)'도 참고가 될 만하다. 화왕계에는 왕이 차와 약으로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을 내야 간신들을 물리치고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을담고 있는데, 이는 신라때 화랑들 사이에서 차생활이 성행했으며 이것이 삼국을 통일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을 말해준다.


신라인들이 차를 마시는데 어떤 예법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다고했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 예(藝)를 고루 갖춘 사람을 '다인'(茶人)이라고 칭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차는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할 뿐만 아니라 명상에 적합하므로 수도하는 승려, 수련하는 화랑(花郞:귀족)과낭도(郎徒 : 평민)가 애음하였으며, 또한 야외 중심의 음다풍(飮茶風)이 성행하였다. 당시 신라인들이 자주 마시던 차를 '삼국유사'에는 말차(沫茶), 즉 잎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든 차라고 기록하 고 있다. 학자들은 잎차와 말차가 함께 있었으나 말차가 더 성행하였을 것이라고 전한다. 



• 고려시대


신라의 다예(茶藝)를 계승한 고려의 다예는 우리나라 역사상 차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왕이 손수 말차를 제조할 만큼 왕실과 사원에서 차를 중시하고 애음(愛飮)하였으며, 주요 국가행사는 반드시 주과식선(酒果食膳)을 올리기 전에 임금께 차를 올리는 진차(進茶)의식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궁중에 차를 취급하는 관청인 다방(茶房)이 설치되고 사원에는 차를 재배, 제조하기 위한 다소촌(茶所村)이마련 되었으며 대중용 차가게인 다점(茶店)과 (훗날 차문화가 쇠퇴하면서 주막으로 고쳐부르게 됨) 여행자 휴게소인 다원(茶院)이 설치되었다.


궁중의 의식 즉 왕비책봉의(王妃冊封儀), 공주하가의(公主下嫁儀), 연등회 및 팔관회등에서 진차례(進茶禮)가 시행 되었음은 물론 일반에서도 다례가 시행되었다. 고려인들은차를 기호음료로 즐겨 마셨으며 차를 마시는 즐거움 이외에 차를 달이는 분위기에 도취되곤 하였는데 이러한 다풍은 신라의 그것과도 매우 흡사하였다. 


고려인들이 마시던 차의 종류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잎차, 말차, 단차였는데 이중에서 말차의 음용이 가장성행 하였다. 고려인들의 차생활은 왕실에선 다분히 의식적이었고, 사원에서는 불공의 첫째요, 수도용으로 애음되었지만 일반 선비사회에서의 차생활은 격식없는 자유 분방한 것이었다. 차 생활로 머리를 맑게하며 차와 더불어 문학을 논하고, 정치적 혼돈 속에서는 스스로의 심성을 순화시키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차를 음미함으로써 인생을 다듬고 되돌아보고 때론 반성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차는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불교를 더욱 깊이있게 했고 문화 예술의 발전과 함께 민족의 인품을 향상시켰다.


신라시대 이상으로 덕망있는 군주나 고매한 학자들은 '다인'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큰 명예로 여겼다. 이 시대에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영국 사람들이 홍차를 담기 위해 본차이나를 빚었듯이, 고려인들의 차 문화와 더불어 꽃피웠던 고려 청자의 역사다. 비색과 독특한 제조 기법으로 찬란한 자기 문화를 이루었던 청자는 3세기경 중국에서 빚기 시작,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 무렵 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중국으로부터 차 문화가 전파되면서 귀족, 왕실, 승려 사이에 차마시는 습관이 급격히 확대되어 도자기의 수요도 크게 증가 했는데 그 증거로 초기에 도자기를 만들었던 가마터에서 의식 용구가 출토되었고 출토된 유물 대부분이 차를 마시는 그릇인 다완(茶宛)이었다. 12세기에는 상감청자라는 독특한 제조법이 개발되어 청자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생산 품목도 다완뿐만 아니라, 화장용구, 문방용품, 건축용 자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그러나 몽고의 침입 이후 청자도 퇴보하여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분청자기라는 청자 2세대로 바뀌게 된다. 차를 마시는 방법도 고려와 조선초까지는 말차(가루차)가 성행하였으나 이후 오늘날과 같은 잎차가 생산되면서부터 차 마시는 도구도 찻사발에서 찻주전자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다관은 그 모양이 남녀의 신체를 형상화시킨 형태로 제작되었는데 몸체와 뚜껑은 풍만한 여성의 유방을, 찻물이 나오는 물대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화한 것으로 인체를 심미적으로 표현했을 뿐만아니라 여자와 남자 즉, 음양의 조화를 특징으로 하고있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차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세계적인 청자문화가 번성하였던 시대이기도 했다.



• 조선시대


고려의 융성했던 차문화는 숭유억불의 조선조로 접어들면서 급격한 쇠퇴 현상을 보였다. 온 국민이 즐겨하던 기호음료에 종교색 이란 있을리 없지만 차는 마치 '불교의 상징'처럼 인식되어 조선의 분위기에서는 멀리하여 쇠퇴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조선의  돌이킬수 없는 실수였다. 관혼상제의 차는 모두 술이나 청정수로 고쳐지게 되었고 급기야 중엽에 이르러서는 척불(斥佛)로 인하여 사원 활동이 위축되고 그로 말미암아 사원 주위의 차생산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또한 차공(茶貢)제도로 인해 차 생산이 없는 지역의 민초들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15세기 말, 16세기는 그렇게 차문화가 쇠퇴 일로를 걷던 시기였던 반면 일본에서는 다도가 성행하게 된 시기였다. 더구나 1592년 발발한 임진란 7년을 겪으면서 조선 천지는 피폐해졌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또하나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가 겹쳤으니 명(明)이 전쟁을 도와준 대가로 요구한 세폐에 조선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많은 양의 차가 포함된 것이다.


조정은 어려운 상태였고 차 생산을 급격히 감소한 때였는데도 조정은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강제로 차세를 부과하는 통에 야생하는 차나무가 있는 지리산 남쪽의 백성들은 특별한 고초를 겪어야 했고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이윽고 차나무가 있는 산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차는 은혜의 식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원수 덩어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이 편찬되고 차 대용음료인 인삼즙, 쌍화탕, 결명자, 율무등이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차는 더욱더 깊이 숨게 되었다. 차가 본디 고유명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커피도 차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무식'이 싹트기 시작하여 아무것이나 다 차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핍박과 시련속에서도 조선의 대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와 한국의 다성이라 일컬어지는 초의 장의순을 통해 차는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 근대


일제 시대에는 일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그리고 한국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광주의 무릉다원, 정읍의 소천다원, 보성에 보성다원 등이 조성된 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경영된 다원은 무릉다원이었는데 고향인 일본 돗도리현에서 차를 만들던 경험이 있는 오자끼는, 1912년부터 광주 무등산 증심사 부근의 야생 차밭을 가꾸어 무릉다원으로 개발했다.


이 무릉다원이 우리 나라 최초의 기업 성격의 다원이었다. 일제 시대 때의 차의 재배를 살펴보면 일본은 보성지역에 대규모의 차 생산지를 만들고, 이 곳에서 나는 차를 본국으로 가져갔다. 따라서 이 시대에 주로 조성된 다원들은 식민지 2중, 3중의 착취 구조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다. 이 시대에 큰 맥을 잇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무등산에 기거하면서 우리나라 남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 선생을 들 수 있으며, 현대에 들어오면서 문일평 선생이 차에 대해 아주 박식했다고 한다.


또한 강진 지방에서는 백운 옥판자 및 금릉 월산차 등이 제조되었다. 백운 옥판자란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백운동에 있는 옥판차 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국내 최초의 제품명을 갖춘 녹차 제품이었다. 현재, 우리 나라의 차는 경상도와 전라도 이남 지방에서 생산 되고 있다. 사원이나 가정에서 소규모로 생산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규모의 다원을 조성하여 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지리산에는 계제다, 화계제다 지리산 제다 등의 소규모 차 가공 공장이 있으며,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보성 다원은 광복 후의 혼란과 6.25 사변으로 인해 황폐해졌다.



차의 전례


차는 우리 나라에 삼국 말기 중국으로부터 불교 문화의 도입과 함께 전래되어 신라 말기와 고려 시대에 매우 번성하였으나  조선시대 불교 문화의 쇠퇴와 함께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학자들이나 승려들에 의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해 오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재흥의 기회를 맞고 있다. 


기록상으로 나타난 차의 전래는 삼국사기 권 10 흥덕왕조와 동국통감 권 11 흥덕왕조에 의하면, 최초로 차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신라 27대 선덕왕(632∼647)때이며 차 종자가 처음 파종된 것은 42대 흥덕왕 3년(828)으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겸이 당나라의 황제인 문종으로부터 인덕전에서 차 종자를 받아가지고 돌아온 것을 흥덕왕이 이를 지리산에 파종하도록 하여 이 지역의 명사찰인 쌍계사와 화엄사 그리고 월출산의 도갑사등을 중심으로 점차 전파되어 53대 신덕왕 때부터는 매우 성행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일본과 더불어 가장 먼저 차가 전래된 국가로서 1100년 이상 차의 역사를 가지고있으며 우리의 생활 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차나무의 분류


차의 식물학적 분류와 학명은 오랫동안 여러 학자들 사이에 혼란을 야기해 왔는데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V. Linne)가 주장한데아 시넨시스(Thea-Sinensis)를 학명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Thea」는 “차”음이 유럽 쪽에 전파되어 굳어진 학술어(學術語)이며,「Sinensis」는 중국이라는 지명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린네(Linne)는 1753년 5월에 최초로 차나무의 학명을 「Thea-Sinensis」라고 붙였습니다. 그러나 3개월 후 에는 학명을 다시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라고 바꿨습니다. 


그 후 몇몇 사람이 비슷한 학명을 붙였으나 크게 쓰여지지 않고 1958년에 영국의 식물학자 실리(R. Sealy)가 학명을 카멜리아 시넨시스(L)오우 쿤쓰(Camellia-Sinensis(L) O. Kuntze)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혼미를 거듭해 온 차나무는 특용작물로서 산다과(山茶科)에 속하는 상록활엽관목(常綠闊葉灌木)입니다.


가을이면 하얀 찔레꽃 같은 흰꽃이 소담스럽게 많이 피며 동백나무 씨앗 같은 둥그런 열매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립니다. 대체로 기후가 온난하고 강우량이 많으며 배수가 잘 되는 경사지나 구릉이 생육에 알맞고 토질은 부식질이 많은 양토질로서 겉흙이 깊고 배수가 잘 되어야 합니다.


 - 차나무의 종류


차나무의 생김새는 종류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대체로 차나무는 4종류로 분류됩니다. 중국대엽종(中國大葉種: macrophylla), 중국소엽종(中國小葉種:bohea), 인도종(印度種:assamica), 샨종(Shan種:buymensis)등 4변종(四變種)이 있습니다.


중국대엽종은 중국의호북성(湖北省), 사천성(四川省), 운남성(雲南省) 지방에서재배됩니다. 잎은 약간 둥글고 커서 길이가 13 - 15cm(엽장)이며 넓이가 5∼6.5cm이고 나무의 높이가 5∼32m 정도까지 자랍니다. 고목성으로 엽맥은 8∼9쌍이고 끝이 뾰족하지 않습니다. 중국소엽종은 중국의 동남부와 한국, 일본, 타이완 등지에서 많이 재배되는데 주로 녹차(綠茶)용으로 이용됩니다. 나무 크기가 2∼3m밖에 안 되어 관리하기가 편하고 품종을 개량하여 다량생산을 할 수 있는 좋은 수종입니다. 잎은 작아서 4∼5cm에 불과하며 단단하고 짙은 녹색입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차나무는 중국소엽종 계열로서 온대성 기후에 알맞고 추위에도 강한 품종으로 수입 연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재래종 차나무입니다. 그리고 전남지방 일부 다원에서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는 차나무는 일본에서 수입한 야부끼다중(藪北) 차나무로서 생산량이 많고 추위에도 잘 견딥니다.


 - 차나무의 특성


차는 우리 나라에 삼국 말기 중국으로부터 불교 문화의 도입과 함께 전래되어 신라 말기와 고려 시대에 매우 번차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 또는 관목으로 잎은 품종과 착생위치에 따라 변이가 크지만 길이가 6-20cm, 나비가 3-4cm 정도의 긴 타원형으로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에 작은 톱니가 있습니다. 


잎의 질은 단단하고 약간 두꺼우며 표면은 윤이 납니다. 품종의 따라 잎 빛깔의 농담 및 주름에 다소 차이가 있으며 자색, 황색, 갈색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린 잎의 뒷면에는 고운 털이 나며, 색깔은 녹색,황색,홍색, 자색등 품종에 따라 다릅니다. 꽃은 새순의 끝 또는 잎 겨드랑이에 l-3개가 붙어 8월 하순부터 12월까지 피고, 꽃잎은 6-8쪽으로 흰색 또는 담홍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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